“걔 기억나? 그 새끼 있잖냐. 아주 야심 가득한 놈.”
“몰라.”
“… 생각하는 성의는 좀 보여주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말을 해라. 그렇게 말하면 누구라도 모르겠다. 그 나이에 열에 다섯은 야심만만하지. 중딩이. 휘겸의 대답에 말을 꺼낸 친구가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휘겸의 건조한 말이 그럴듯했다. 스무고개를 이어갔다간 휘겸이 보인 작은 관심마저 사라질 것 같았는지 친구는 곧장 그 ‘야심 가득한 놈’의 이름을 대었다.
“박차차. 중3 때. 기억나지. 전교 회장 선거 때 난리 난 놈. 회장 되겠다고 별의별 짓을 다 했잖아.”
“그게 몇 년 전인데. 몰라, 인마. 중학교 전교 회장이 기억나는 게 신기하다.”
“회장 아냐. 후보 후보. 걔 요새 무슨 전세사기치고 다니다가 재판 중이라더라. 전적이 화려하더구먼. 불법 전대부터 착실하게 시작해서 더한 걸로 넘어갔더라고.”
“…”
“하여튼 요새 무섭다니까. 나도 세연이랑 집 구할 때 진짜 걱정을 걱정을.”
친구는 휘겸의 반응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바삐 말을 전했다. 관심 없다는 표정의 휘겸은 한층 더 무감해졌다. 세상에는 별사람이 다 있구나, 휘겸은 그리 생각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소식통 노릇을 하는 친구 역시 별나다고 생각했다. 휘겸을 그 별난 사람에 포함하고 있는 친구 마음은 모른 채로.
휘겸의 표정을 읽은 친구가 자신도 다른 애들한테 들은 것이라 덧붙였다. 근데 그 전세사기라는 게 결국 집에서 나갈 때 쯤에 알게 되지 않나? 구할 때 걱정해 봤자 당하면 어쩔 도리가 없는 게 전세사기 아니었던가. 휘겸은 확인되지 않은 제 생각에 의문을 품으며 친구를 향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기 왔다.”
식당 문소리에 둘의 대화가 멈췄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휘겸의 친구가 들어오는 여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바쁘지 않았냐 물으며 여자를 살뜰히 챙겼다.
여기는 세연이, 이세연. 우리 예신 님. 여기는 김휘겸. 내가 말했던 친구. 중학교 때부터 동네 친구고 어제도 야근한 세연이가 나랑 청첩장를 주러 친히 행차하신다는데 본인이 주말에 시간 없다는 이유로 평일 저녁에 굳이 굳이 불러낸 주범이시지. 남자의 농담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금방 풀어졌다.
식사가 이어지고, 청첩장이 전달되었다. 식장 얘기에서 상견례 얘기로, 신혼집 얘기로 이어지는 동안 휘겸은 그렇구나, 그래, 그렇대? 하며 적절한 정도의 맞장구를 치는 중이었다.
“너도 윤지랑 꽤 만나지 않았나?”
“그렇지.”
휘겸이 입에 맴도는 많은 말을 뒤로하고 짧게 답했다. 옛날부터 자신의 고민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생각하기 싫은 주제를 쏙쏙 뽑아내는 무서운 녀석이었다.
묘하게, 급격히, 잔잔해진 분위기를 느낀 세연이 젓가락질 소리를 냈다. 불편한 분위기가 싫은 탓이었다.
대답 후 친구를 보던 휘겸이 말없이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를 들이밀었다. 윤지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메시지와 휘겸을 번갈아 보던 친구가 말했다.
“그래서 고민이라고?”
“저도 봐도 돼요?”
괜찮다는 휘겸의 말에 세연이 남자 친구 쪽으로 붙어 메시지를 보았다. 메시지는 짧고 간단했다. 흐응, 콧소리를 낸 세연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딱히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세연이 휘겸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요즘 다들 준비되면, 준비되면, 한다지만 저희도 준비된 적 없어요. 결혼하자는 말 한마디면 충분한 거예요. 어떤 것들은 말로 뱉어져야 사실이 돼요. 말을 하지 않으면 있어도 없던 게 돼요. 그러려고 했다는 말은 그러려고 한 거지 그런 게 아니잖아요. 결혼하려고 한다는 것과 결혼하자는 건 다른 거예요.”
“여자 친구분은 그걸 원하는 거겠죠. 부산이건 서울이건 제주도건 위치나 어디에 살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의 확신이 중요한 거죠.”
“…”
“이 사람이 ‘나’랑 같이 살고 싶은 건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
세연이 ‘나’를 끊어 강조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결혼하자는 말을 끝까지 안 해서 이 사달이 난 거다?”
친구가 제 여자 친구의 말을 거들었다. 세연의 말을 들은 휘겸은 이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긴 시간을 돌아왔구나 싶었다. 갈등과 동요가 싫은 휘겸은 무의식적으로 윤지와 겪어내야 할 많은 대화와 불편한 상황을 피해 다니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진다는 말로, 발화보다 정서적 연결의 가치를 우위에 두었다. 말보다 느낌이 통해야 한다고, 그거면 된다고. 정작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건 ‘말’로 했으면서.
말하지 않을 거라면 행동이라도 해야 했다. 말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행동을 보여줘야 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상대에게 속내를 보여주는 일은 제법 중요한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가치가 있지만, 상대에게 그 가치를 네가 들여다보라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는 거였다.
너무, 잘못했다.
자신의 무난함과 무던함이 이 관계를 이끌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실은 무난하고 무던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 있었다.
“윤지네 가야겠다. 이따.”
잠자코 있던 휘겸의 말에, 조언을 나르던 커플은 뿌듯해졌다. 오, 세연아 우리 좋은 일 해서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 남자는 장난스레 호들갑을 떨었고 세연은 그런 남자 친구를 보며 웃었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 세연이 말을 이었다.
“제 친구가 딱 휘겸 씨 입장이었는데 걘 헤어졌어요. 티는 안 내도 속상해하긴 하는 거 같더라고요. 후회하지 마요, 휘겸 씨는.”
누군데? 인경이. 아아 인경 씨, 자기 대학교 친구? … 어, 야, 휘겸아. 아까 중학생 때 전교 회장 있잖아. 박차차 말고 당선된 사람 인경인데. 그래, 또 나만 신기하지. 네 놈이 그렇지….
세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윤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휘겸이었다. 그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