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씨에겐 꿈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것이다. 제법 큰 가구들까지 플리마켓에서 정리한 진 씨의 방은 캔버스와 이젤로 채워져 있었다.
엄마와 유치원 선생님이 그림 종이 한 장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다 놀란 소리를 내었다. 그게 일곱 살의 어느 날, 기억만 남은 기억. 초등학생 때는 종종 있던 교내 그림 대회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보던 선생님들이 감탄을 뱉곤 했다. 그러고 나면 며칠 후 상장을 들고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때쯤 진 씨는 자신의 그림이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본 것을 그대로 그릴 수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가끔 사실적이었고 때론 추상적이었다. 어린 진은 길가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놀이터 모래 위에서 그림을 그렸고, 방 안에서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을 들고 어른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어머 진이 그림에 재능 있구나. 어린 진이 마주한 입들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줄곧 그림을 칭찬하던 사람들은 돌연 그림 실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창의적인 생각을 하느냐고 칭찬하더니 갑자기 현실을 생각하라고 했다. 슬슬 진로를 정해야지. 칭찬을 늘어놓던 사람들에게 그림은 진로가 될 수 없었고 십 대가 된 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진 씨는 좋을 대로 뱉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말들에 지쳤다. 가만히 있던 사람에게 마음대로 꿈을 심더니 기대로 그 꿈을 부풀려 놓고선, 무책임하게. 그래서 따졌더니 누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느냐고 했다. 그런 적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잊기로 했다. 잘한다는 말도 잘하면 안 된다는 말도. 그런 적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 적 없던 것처럼.
진 씨는 탈출하고 싶었다. 큰물에서 논다는 게 뭔지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취직을 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취업이 잘 된다고 알려진 학과를 가고, 대세랄 것을 따랐다. 웹 개발을 배웠다. 뭔가를 만들어내고 머릿속에 있는 걸 구체화해 낸다는 점에서 그림과 비슷했다. 이쪽은 html과 자바스크립트를 도구로 썼다. 붓 대신 노트북을 들고 진 씨는 서울로 왔다. 큰물이라는 그곳으로.
서울로 가는 기차의 차창으로 한강을 바라보던 진 씨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서울이 큰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삶을 휩쓸어 버릴 만큼 큰물이기를. 이왕 대단한 물이라면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 씨는 내심 자기 삶의 요동을 바랐다. 스스로 어쩔 수 없을 만큼 큰 물결이 일어서 어떠한 핑계를 대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였으면 좋겠다. 용기가 없어서란 변명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국면으로 알아서 바뀌었으면 좋겠다. 잡생각 따위는 사치일 정도로 적응하기에 바빴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