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어 있다. 나 같아. 재하 씨는 현관문 앞에 서서 자신의 방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큰 가구는 침대 하나만 남았다. 쓸만한 것들을 얼마 전 플리 마켓에 죄다 팔았고, 쓸만하지 않은 것들은 모조리 버렸다.
작은 공간을 꽉 채우던 지난날의 집은 퇴사 후 밝은 척을 하던 자신의 모습을 닮았었다. 가짜야. 다 가짜. 거짓말쟁이. 속은 비어 있었으면서, 겉은 괜찮은 척. 물건들로 복잡한 집구석에 있으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숨을 곳이 없는데도 숨고만 싶었다.
남들 앞에서 온갖 척을 하던 자신의 모습이 불쑥 머릿속에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사무치도록 외로워했으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외롭다라는 한 마디를 솔직하게 뱉어내지 못했다. 전혀 장난할 기분이 아니었는데 힘들다는 말을 장난스럽게 했다. 누구에게든 도와달라고 말해야 했는데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재하 씨는 마음을 꺼내 샅샅이 털어내고 다시 끼우고 싶은 심정이었고, 마음 대신 털어 버린 집안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기분은 그 이상으로 나아지지 않았지만.
좋은 기분의 지속력은 나쁜 기분보다 짧았다. 아니, 좋은 기분을 갉아 먹고 나쁜 기분이 자라는 듯했다. 깨끗한 집안에 홀로 있으니 정말 혼자였다. 혼자라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지독하게 혼자이고 싶었는데 막상 혼자라는 느낌이 드니 모순되게도 극심한 슬픔이 몰려왔다. 재하 씨는 고작 이런 게 제가 자초한 결말이라는 사실에 더 울적해지고 말았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삶을 영위한다. 그러면 애초에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을 하라고 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뭘 그렇게 좋은 일을 해서 잘 살라고 한 거지. 좋은 일이 뭐길래. 잘 사는 게 도대체 뭐길래. 재하 씨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한다고 들어온 ‘좋은 일’을 떠올렸다. 자신은 결국 하지 못한 일들. 혹시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좋은 일을 갉아 먹다가 나쁜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하. 재하 씨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재하 씨는 손에 들려 있는 휴대 전화를 보았다. 잔뜩 쌓여 있는 메시지와 알림. 아무도 모르게 지나간 생일. 줄어드는 통장 잔고. 기차 예매 앱. 기차. 기차라. 다신 타고 싶지 않은 이동 수단. 마지막으로 본가를 언제 갔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지 않은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아 남아 있는 부재중 알림이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남아있다. 전화를 다시 걸지 않고 문자로 대신한 응답에는 바쁘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다. 퇴사한 지가 한참이지만 아직도 말하지 못했다. 취직했다고 말하자 기뻐하던 부모님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힘들다고 하니 다들 그렇게 산다고 힘내보라고 한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했을 땐 성공한 사람이었는데, 고작 몇 개월 만에 퇴사한 그때부터 실패자였을 뿐이다. 그 후로 몇 년째 이직 준비 중인 현재, 실패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실패자의 정신에 잠식되어 버렸다.
서울에서 해내고 싶었는데. 서울에서 해내 보이고 싶었는데. 재하 씨의 어지러운 생각들이 휑한 방안을 정신없이 가로질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거짓말도 못 하겠는걸. 나를 속이는 것도, 남을 속이는 것도 할 수 없다. 재하 씨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고 말았다. 방을 깨끗하게 만들고 나서야 재하 씨는 자신의 본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실은 이곳을 떠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재하 씨는 다시 도망치려고 한다. 기차가 아닌 버스를 타고. 짐이라곤 아침약과 저녁약만 챙긴 채로. 엄마? 아, 아빠예요? 엄마는?
“나 이제 그만 집에 갈까 해.”
짧은 통화 연결음과 휴대 전화 너머의 ‘그래’라는 짧은 응답에서 긴 기다림이 느껴졌다. 재하 씨는 혼자임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