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에게 말을 건 사람은 533호의 세영이었다. 세영도 한때 벽을 타고 들어오는 옆집의 소음 때문에 꽤나 괴로운 밤을 보낸 경험이 있었다. 알고 보니 옆집의 임차인은 숙박 공유 사이트를 이용해 그 집을 전대하고 있었고, 세영은 그곳을 주거 공간 대신 여행의 장소로 여긴 예약자들로 인해 심각한 소음 피해를 겪었다. 보나 마나 그런 집이 또 있는 거겠지, 세영의 질문은 그런 뜻이었다.
“아, 그 집은 발견했을 때 바로 계약 해지 됐어요. 위약금 물고 나갔거든요.”
“여기 세대 수가 많아서. 그런 집이 더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생활 소음만 가지고 그렇게 흥분하는 건 아닐 것 같아서요. 세영이 곧장 이어 붙인 말에 예의 그 특유의 염세적인 태도가 묻어났다. 세영은 이 세상에 갖고 있는 작은 희망을 지독한 환멸로 숨기곤 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앙상블 타워라는 장소와 공동 주택이라는 공간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는데, 그녀가 주영에게 던진 의혹에는 그거 봐라 이렇게 좋자고 한 일에서도 개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냐는 조소를 담고 있었다.
무력함이었다. 그녀는 일명 좋은 세상을 바랐지만 세상은 바람과 달리 좋아지지 않았다. 손톱만큼 좋아지면 손바닥만큼 나빠지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치 더 나은 세상이란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구는 편을 택했다.
“요새 지하 주차장 외부인 주차 때문에 엘리베이터 느린 거 그건 어떻게 안 되나요? 사람들이 1층에서 지하로 엘리베이터 내려갈 때마다 욕하는 거 듣기 싫네요.”
주영은 내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아무리 자신이 회장이라도 그렇지, 취조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기 앞에 선 이 여자는 도무지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으면서도 날이 잔뜩 서 있는 느낌이었다. 또 그다지 궁금한 것 같지도 않으면서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당황스러웠다.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영은 자신이 주영에게 화풀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뭐라도 해보려는 사람을 향한 알량한 질투와 세상은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명분 삼아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수치가 묻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마음을 숨기고 자신의 행동이 맞다는 것을 합리화하고 싶어서 애먼 사람의 용기를 짓밟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무지 나란 인간은 그냥 뻔뻔해질 수 없는 걸까? 신경 끄고 나만 알아서 잘 살 순 없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굴어야 하는 걸까? 세영은 이런 자신이 우스웠다.
도망가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이 또, 왔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끝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처받기 싫어서 자신은 도망칠 거라는 걸, 그 결말을 눈치채기도 어렵지 않았다.
“미안해요. 저도 답답해서.”
예상 가능한 결말에서 벗어나고 싶은 한 인간은 작은 용기를 냈다. 실시간으로 말라가는 듯한 주영의 표정에, 세영은 답답했을 뿐이라며 사과했다. 딱히 그쪽에게 그럴듯한 답변을 바란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플리마켓 하신 거 잘하신 것 같아요. 아까 난동이 있긴 했지만 더 심각해지지 않아서 다행이고.”
세영이 작은 한숨을 쉬고 행사 지원 부스 바깥으로 판매 부스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 웃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지금은.”
주영이 세영의 시선을 좇았다. 그제야 비로소 몇 시간 전의 난동에서 해방된 것만 같았다. 자신이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사건을 수습한 후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동안 입주민들은 저들 스스로 우리들의 행사를 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정력과 생기가 느껴졌다. 어질러진 곳이 금세 정리되고, 사람들이 다시금 모여들었으며, 물건을 사고팔았다. 어떤 곳은 이미 판매가 마무리되어 다른 입주민을 돕고 있었고 셀러였던 사람은 이제 손님이 되어 부스를 돌았다. 플리마켓의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그 엘리베이터는…”
“다들 괜찮겠죠. 적어도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