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을 들은 수연은 오늘치 제령을 마치고 슬슬 집에 갈 채비를 했다. 기존에 잡혀있는 일정을 뺄 수 없어 항상 야심한 시각에 대전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해야하곤 했는데 거기에 일도 보통이 아니다보니 고단한 얼굴이었다. 지영은 자신으로 인해 수연이 무리하고 있는게 아닐지 묘한 부채감을 가졌다.
“갈 거야?”
“가야지. 힘들어서 이만 자야겠어. 그나저나 문제네. 날이 갈수록 원혼들의 힘이 세져서 제령을 해도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으니까. 뭐, 그래도 덕분에 퇴근 시간까지 덩달아 늦어지고 있으니 추가 요금이 상당히 붙겠는걸?”
“나쁜 년….”
“여튼 당분간은 앞에서 말했던 요금대로 처리해 줄게. 친구 잘 둔 거야. 아니었으면 진작 죽어서 땅 속에 묻혀있었을 거라고.”
“그래, 그래. 참으로 고맙다. 이만 빨리 가서 자라.”
앞에서 진지한 모습은 어디 가고 친구에게 돈을 청구하며 생색을 내는 수연을 보니 괜한 걱정을 했나 후회가 된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친구가 수연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다. 얼른 피로에 찌든 수연을 쫓아내고 지영도 침대에 몸을 뉘었다. 간만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지금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내일부터는 성공할지도 모르는 불분명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에 골머리를 안고 있으니 머리만 아파 잠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기로 결정했다. 곧 지영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수연은 지영의 집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내내 원혼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저주는 수연에 의해 잠시나마 억제되고 있었지만, 그녀가 보기에 이 현상은 언제 종결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근 이주 간 주기적으로 지영의 집에 방문해 제령을 했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제령의 효과가 다하면 집기들은 다시 죽일 듯이 집주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정체 모를 저주는 저주의 매개자와 피해자, 둘 중 한 명이 죽지 않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속셈인 것 같다.
“아무 잘못도 안 했어."
"근데 왜 죽였어?”
"다 네 탓이야.”
"너만 없었으면…!”
불쌍한 원념이 사무치고 있다. 전부 자신의 죽음에 억울함을 느끼고 세상을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성불할 수 있었음에도 저주로 인해 좁은 원룸에 틀어 박혀 갈 곳 없이 지영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 억울함을 가진 방대한 영혼이 결국 집기에 자리를 잡았으니, 지영의 집에서 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수연으로서는 어쩌다 이런 사람한테 잘못 걸렸는지 황당하다. 그러나 모든 일은 지영이 자처한 몫. 알 수 없는 저주에 고통받는 지영이 불쌍했지만, 사실 이제부터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지영이 살기 위해 마음을 다 잡았다는 사실 하나뿐인가. 수연은 쓸쓸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새벽의 도로는 한산했다.
다음 날 점심. 지영은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역으로 향했다. 역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쾌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직장은 한낮임에도 번쩍이는 간판을 위시하고 있었다.
‘K I T C H E N’
키친이라는 상호명이 쓰인 가게로 들어가자 네다섯 명 정도가 되는 팀원이 지영을 반겼다.
“스푼. 오늘 의뢰 확인하고 바로 출발 부탁할게.”
“네. 오늘도 파이팅!”
지영이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에 들어가자 서너 가지 정도의 메일이 메일함에 쌓여 있었다. 그중 가장 최근 온 메일부터 열었다.
[청부살인 KITCHEN] 의뢰입니다
3개월 차가 넘어가며 지영의 일은 의뢰를 받고 서류 정리하는 것까지 늘어났다. 아무래도 도윤은 자신을 조금 더 고용할 생각인가 보다. 그러나 이 평화가 위태롭다는 사실은 지영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따라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영이 해야할 일은 하나였다.
‘어떻게 도윤을 납치하지?’
바로, 도윤을 납치하고 협박하여 저주를 무마하는 일이었다. 참고로 이 허무맹랑한 계획의 발안자는 수연이다. 수연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도윤을 납치한다. 그리고 수연이 협조하여 지영의 저주를 풀도록 협박한다. 그렇게 저주를 해주하고 키친에서 탈출한다. 최종적으로 악랄한 불법업체 키친을 경찰에 신고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닳고 닳은 전문가를 자신과 같은 초짜가 납치하고, 그에 더해 심문까지 해야 하다니. 그러나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한 마당에 못할 일은 없었다. 자신이 도윤과 체결한 불공정 계약에 그를 해치면 안된다는 조항은 없었다. 사실 지영의 입장으로선 공권력의 힘을 무조건적으로 빌리고 싶었지만, 경찰에게 발설하는 순간 이것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아 바로 죽을 것이 명확하니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위안되는 가설이 하나 있다. 생각해보면, 무슨 연유에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도윤은 자신에게 무르다. 그러므로 지영과 수연은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다 잡힌 사냥감이라 착각하고 있을 사냥꾼을 역으로 사냥하는 것. 사냥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