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기상했다. 어젯밤 난희가 자신의 방에 방문한 사실도, 그리고 그녀의 조카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사실일지도 의문이다. 낮동안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전 날의 일이 꿈결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침투했지만, 그를 비웃듯 난희는 또다시 그날 밤 석화를 찾아왔다.
“몰랐는데, 생각보다 뻔뻔하시군요.”
“이제 아셨다면 유감이에요.”
난희는 어제와 다르게 한층 안정된 모습으로 뻔뻔하게 방에 들어왔다. 석화는 자연스레 불청객의 차를 준비했다. 손님은 주인의 노고를 보고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품 속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고 있기 바빴다.
“그건 뭡니까.”
“저택에서 나간다는 허가증 작성이 필요해서요.”
“허가증을 그렇게 조약하게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뭐, 통행증이라도 만드는 것 아니고.”
“통행증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필요합니다. 조약해도 확실한 '계약'이니까요."
석화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티를 잔뜩 내며 인상을 찌푸리자 난희가 설핏 웃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정말이니까. 저는 주인을 모시는 무녀이기 때문에 허가 없이 이곳을 벗어나면, 신벌을 받게 되거든요.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상호 간 약속을 하는 거예요. 나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자주 나가면 의심을 사게 되니 신중하게 날을 잡아야 합니다. 지금 하는 것은 그 작업의 일종이라 볼 수 있고요."
“신벌이라 하면?”
“요컨대 큰 병이 납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고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기 어려운 말이군요.”
“네, 그렇죠. 그렇지만 그런 일들이 현실이 되는 곳이 바로 저택이라는 사실을 잘 아실 텐데요. 더군다나 가까이서 주인을 모시고 있는 저로서는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석화가 차를 내놨지만 난희는 여전히 무언가를 적기에 바빴다. 차가 서서히 식어감에 따라 심심해진 석화는 난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저택은 마치 거대한 ‘신당’이라 할 수 있겠군요. 저택의 주인께서는 신이라도 된답니까?”
“이미 봐서 알겠지만, 사람은 아니죠. 알다시피 저택의 주인은 실존하지 않아요. 그저, 몸을 바꿔가며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것이 왜 이번에는 당신 조카를 노리는 거죠?”
“저의 쓸모가 곧 없어지기 때문이겠죠. 흉포한 주인을 모시며 몸이 많이 허약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이만큼이나 견딘 중간자 또한 저밖에 없었고, 그랬기에 탐이 났던 거겠죠. 이 피가.”
“당신의 조카도 그런 능력을 가졌습니까?”
“못 본 지 오래되었지만, 그와 관련하여 연락이 왔던 적이 있으니, 아마 그럴 겁니다. 신께서 탐낼 정도이니 어쩌면 저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럼 조카를 이곳에 데려온다면, 당신은 자유가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분주하던 난희의 손이 멈추었다.
"신께 구속되는 일 없이 조카 하나만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잖아요. 왜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걸으려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택에서 오래 있어봤으니 알 텐데요. 동정만큼 얄팍한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요."
"••••••."
"납득이 안 돼서 그래요."
"네, 알아요. 압니다. 그저 마지막 발악일 뿐이에요. 저는 질렸어요.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현실도, 반복되는 지옥도. 그래서 바뀌고 싶은 것뿐이에요. 이 굴레를 반복해 봤자 어떠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난희가 석화의 눈을 또렷이 응시했다. 석화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둘은 눈으로 대화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한 거겠죠?"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물어볼 틈은 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
“일단 조카와 만나보려고 해요.”
“어디 사는지는 알고 있고요?”
“이곳이 어디인지 잊으신 건 아니겠죠?”
저택에서 뒷조사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