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는 괜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후하후하 짧은 호흡이 몇 번씩 이어졌다. 그는 지금 1504호, 진의 집 앞에 서 있다. 한 손에 진이 찾던 그 빨간 앨범을 쥔 채로.
플리마켓 이후 주고받은 연락은 없었다. 그날 수호에게 빨간 앨범이 자기 보물이라며 돌려 달라고 했던 말이 농담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낌새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진은 재촉하지 않았고 재촉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수호는, 지금까지 그러했듯, 신경이 쓰였다.
이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늘 이렇게 신경 쓰는 사람 쪽이 되겠지. 어쨌든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것이니까.
돌려줄 생각이라면서 수호는 돌려줄 마음이 애초에 없는 사람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집에 없을 평일 낮에 이곳에 왔다. 하기 싫은 얘기를 해야만 해서 전화를 걸긴 했지만 수신자가 받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수호에겐 진이 집에 없었다는 핑계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시도는 했지만 당신은 없었어. 그는 사소한 비겁함 뒤에서 초조해하고 있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수호가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는 찰나였다. 진이 작게 열린 문틈 새로 얼굴을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수호와 눈이 마주쳤다.
“아…”
당황한 수호의 입에서 탄식도 감탄사도 아닌 말이 튀어나왔다. 수호와 눈이 마주친 진 역시 조금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수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이거.”
“이상한 사람인 줄 알고 깜짝 놀랐네요. 밖에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나와봤더니.”
진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순간 놀라 얼어버린 수호가 어색하게 눈을 돌리며 앨범을 쥐고 있던 손을 진의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진의 말에 굳어 있던 수호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그렇게까지 시끄럽게 굴고 있었나 나…? 조용하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들어와요.”
수호는 늘 이렇게 자연스러운 이 사람이 신기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데 참 자연스럽다. 그 지점이 이상했다. 종잡을 수 없음과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이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 단어들이 꼭 함께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의 집에 들어선 수호는 다시 한번 그 종잡을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집이 참 종잡을 수 없고 자연스럽다. 집에 아무것도 없고 그림이 가득했다. 그런데 원래 그랬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 와. 집이 왜 이래요?”
“네에, 진짜 실례하셨네요.”
으에, 아니, 아니, 그 말이 아닌데요. 수호가 저도 모르게 나온 무례한 표현을 수습하느라 애를 썼다. 진은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면서도 공연히 꼬투리를 잡았다. 말을 늘려가며, 짓궂게 웃으며. 됐어요, 됐어. 그림 그리려고 싹 정리했어요. 조만간 한국에 없을지도 모르고.
앞쪽을 보던 수호가 고개를 홱 돌려 진을 봤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아졌는데, 정작 무얼 묻고 싶었는지 몰라 입을 닫았다. 그런 수호의 눈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이 왜 왔냐는 말을 덧붙였다. 수호는 근처에 있던 책상에 앨범을 올려놓았다. 앉아요. 별로 마실 건 없네. 진이 집에 있던 탄산수를 수호 앞으로 밀며 책상 앞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수호는 책상 너머로 진의 그림을, 진은 수호가 돌려준 앨범을 오래도록 보았다. 둘은 서로를 보고 있지 않으면서 서로를 봤다.
“회사 다니는 거 아니었어요?”
“그쪽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해요.”
수호가 먼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많은 말이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그는 진이 자신의 말뜻을 알아차릴 거라는 걸 알았다. 진 역시 많은 말을 생략하고 답했다. 수호의 질문과는 어울리지 않은 답변이었다. 수호는 항상 몇 단계를 건너뛰고 말하는 진의 화법이 고약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진답다고 생각했다. 이러다 나중엔 시라도 쓰겠어. 제목은 종잡을 수 없고 자연스러운.
“언젠가는 하겠죠.”
“…언젠가는 언제나 지금이라니까.”
진에게 앨범을 돌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수호가 8층을 눌렀다. 제집으로 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표시된 층수. 14, 13, 12….
8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에서 닫힐 때까지 나가지 못해 수호는 다시 어딘가로 실려 가고 있었다. 누군가 타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10층에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주민이 의아한 듯 일순 눈썹을 움직였지만 이내 빠르게 1층을 눌렀다. 수호는 윤지의 가게에 맡긴 베이스를 찾아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