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관두는 것에 딱히 큰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다. 진 씨의 경우가 그러했다. 진 씨는 휴대폰 용량이 부족해서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 진 씨의 휴대폰에 용량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떴다. 사진을 지우고, 파일을 지우고, 앱을 지우다가 그만 슬랙을 지우고 싶어졌다. 그 순간에 진 씨는 그런 걸 느꼈다. 아, 지금 슬랙을 지워야만 해. 그렇지 않고서는 폰은 영영 죽어버리고 말 거야. 진 씨는 휴대폰의 생명이 슬랙 삭제에 달린 양 절박하게 굴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진 씨는 그 길로 리더에게 퇴사 의사를 전했다. 일견 충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결정임에도 실행하는 진 씨의 모습은 놀랍도록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퇴사 이유가 휴대폰 용량 확보를 위해 슬랙을 삭제하고 싶어서였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들 역시 진 씨가 퇴사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군. 메신저로 날아온 퇴사 알림을 보곤 건너편 자리의 동료가 혼잣말을 했다. 옆의 또 다른 동료가 그의 혼잣말을 듣고 말했다. 퇴사할 거였으면 저번 휴가를 지금 쓰는 게 좋았겠어. 어차피 한 달은 다녀야 하잖아. 그들은 진 씨가 나름 긴 휴가를 쓰고 호주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긴 그런 건 전부 중요하지 않지. 그림을 그릴거래. 멋지다아. 맞아, 멋져. 동료들이 말했다.
놀라울 일은 거기 있었다. 퇴사 이유를 묻는 리더에게 진 씨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답한 것이다. 그림을 그리려고요. 그 답을 하는 순간 기억에 조각된 어린 날의 풍경들이 제가 그린 그림이 되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진이는 그림을 어쩜 그렇게 잘 그리니?
진 씨는 자리에 앉아 끝내 잊히지 않은 그 한 문장을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엄마가 짓던 표정은 조금 희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간은 구겨지고 입꼬리를 올린 채 울지도 웃지도 않는 그 표정은 기쁘기도 했지만 기쁘지만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엄마는 내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나 잘하는 미술 따위에서 아빠를 떠올리곤 했으니까. 그러니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엄마가 그림을 그리려는 나를 죽일 듯이 말리고, 내가 그림을 잊은 척하면서도 잊지 못하는 것은.
풍경들이 사라지고 리더의 음성도 동료의 음성도 자신의 음성도 그쳤을 그때, 진 씨는 이제껏 제가 큰 착각을 했을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왜 서울이 모든 것을 바꿔줄 거라 생각했지?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도망치듯 시드니에 갔어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결심하지 않았는데. 진 씨는 자기만의 결심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의 말을 따라 움직이다 도달한 곳이 이곳이다. 서울은 기회가 많은 곳이니까 어쩌고저쩌고. 많은 걸 경험할 수 있다고 어쩌고저쩌고. 세상 재밌는 일들과 성공 신화는 거기에 있는 것만 같았고, 진 씨는 거기에 제 한 몸을 데려다 놓으면 자동으로 뭐든 될 거라고 착각했다. 아아, 정확히는 자동으로 뭐든 만족스럽게 될 거라고 착각했다.
결국엔 내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인데, 왜 “어딘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건지.
진 씨는 열심히 살았으나 그저 열심히 살아냈을 뿐이다. 어딘가는 서울도 시드니도 아닌 내가 서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진 씨는 나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