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빈들은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인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지속되는 모임에 참여하며, 그들이 모시는 주인의 정체가 산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역시 정상적인 신은 아니었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그리고 저택의 주인을 수호하는 오방신이 귀빈의 정체였다. 저택의 정체가 미친 사이비 단체라는 사실에 무신론자인 석화는 탄복했다. 물론 그것은 가짜라고 하기엔 너무도 그럴싸했다. 하지만, 단 한 번으로 없던 믿음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현실이 곧 진짜였고, 결국 현실을 신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귀빈이 신을 모시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실 신보다는 사람을 모셨다. 이곳에 오고 난 후 소위 말하는 ‘높은’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신의 안부를 물었다. 저기도 신 여기도 신. 아주 신, 신 난리였다. 정작 본인은 그 실체를 봤음에도 전혀 믿을 수 없었는데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신 타령하며 찾아대기 바빴다. 하나같이 가벼운 치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벼운 치들의 혀놀림과 부로 세상이 돌아갔다.
해가 지날수록 석화가 주인을 마주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러다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그 위대한 주인이 강림할 때마다 사람이 죽어났다는 것이다. 황금색 가면을 쓴 주인의 몸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 말은 곧 신이 강림할 때마다 몸의 주인은 죽어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강림을 시도할 때마다 난희의 건강도 악화되었다. 처음 그녀가 강림을 시도했을 때에는 가벼운 코피만 흘리더니 이후에는 피를 토하지 않나 쓰러지지 않나 유난이었다. 그놈의 신이 뭐가 대단하다고 저렇게 사람을 희생하면서 계속 강림시키고 높으신 분들이 못 찾아 난리인 건지 세상이 말세였다. 대단한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귀빈이 되기를 자처한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오르니 더 허망한 자리였다. 물론 그것은 석화만의 생각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처음엔 석화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그가 신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은근히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화는 그런 시시껄렁한 시비에 일일이 대응할 만큼 친절한 성격도 아니었기에 위험하지 않을 수준에서 비꼬고 웃어넘겼다.
의외인 것은 난희였다. 처음에 고수했던 사무적인 태도 이후 석화가 주인에게 몰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난희는 되려 그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처음에는 그를 조리돌림하려고 그러는 건가 싶었는데, 보다 보니 그런 건 아니었다.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난희 역시 석화처럼 주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으나 신을 모시는 보좌가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양가적이었다. 석화는 난희의 호감을 눈치챘지만, 그것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진 않았다. 애초에 난희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만 반복되는 고민에 빠질 뿐이다. 나는 언제까지 믿지도 않는 신을 모시고 일평생을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하는 건가. 의미 없는 삶의 반복이 지겨웠다.
그러다 둘 사이가 전복된 것은 어느 새벽, 석화가 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미약한 노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침입자를 애써 무시하고 잠을 청하려는데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온 복도를 울려댈 만큼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결국 버티기에 패배한 석화가 문을 열자 보인 것은 난희였다. 그는 무복 차림이 아닌 모습으로 복도에 서 있었다. 평상복을 입은 모습이 새롭다고 실없는 생각을 이어가는데 평소보다 난희의 낯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순간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방 안으로 초대했다. 곧 석화가 뜨거운 물을 우려내 티백을 얹어 그녀에게 주었다. 난희는 찻잔을 받아 들고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와중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석화가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새벽에."
"……."
"그런 모습은 또 처음이네요. 주인께 변고라도 생긴 겁니까."
"……."
난희는 답이 없었다. 답답한 행태에 석화가 찬물을 들이켜며 머리를 쓸었다.
"할 말이 없는 거면,"
"지영이를 어떻게 하죠."
"그게 누군데요."
"제 조카에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답니까?"
"꿈을 꿨어요."
"꿈?"
"신께서, 그러니까 주인이."
난희의 창백한 뺨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피를 토해도 눈물 하나 흘린 적 없던 인물이 대뜸 우는 모습에 당황한 석화가 휴지를 찾아 방을 배회하는데 난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신께서 저를 버리셨어요. 그리고 기어코 제 조카를 이곳으로 끌어들일 셈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그 애가 제 꿈에 나올 일이 없으니까요."
"……. "
"제 조카를 지켜주세요."
누군가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그녀의 눈빛에 석화는 휴지도 찾지 못한 채. 도로 자리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지영이를 지켜야 해요."
처음이었다. 난희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인 것이. 마침내 현실이 그에게 범람했다. 저택에 온 이래로 느껴보지 못한 의미가, 목적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아니, 어쩌면 순응에 지쳤는지도 모르지. 석화는 난희가 궁금해졌다. 처음으로 저 무녀가 가진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