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과 수연은 집에 돌아와 양쪽 부모님한테 잔뜩 혼이 났다. 그러나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수연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방과 후마다 만나 동네를 잔뜩 헤집고 다녔다. 수연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했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알아채는 능력이 있었다. 지영은 그런 수연이 부러웠다. 자신이 볼 때는 그저 끔찍하기만 했던 세상이, 수연과 함께 보면 아름답게 바뀌었다.
수연은 자신만 보던 아름다운 풍경을 엄마가 아닌 타인에게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기뻤는지 언제나 지영과 함께했다. 그리고 공유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얼마 되지 않으리라 예상한 지영의 대전 살이도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결국 직장과의 거리로 인해 지영의 아버지는 홀로 서울로 상경했고, 어머니와 지영은 그대로 대전에 남았다. 그 사이 지영과 수연은 중학생이 되었고,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나이가 들수록 둘 사이는 막역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지영의 불안감도 늘어만 갔다. 수연과 함께 보는 풍경, 그리고 그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았지만 무당이 되긴 싫었기 때문이다. 수연은 그 무렵 무당이 자신의 천직이라며 그녀의 어머니한테 무속 공부를 받고 있었다. 수연이 세습무를 할 동안 지영은 국어 문제집을 풀었다.
“넌 그게 재미있어?”
“응. 나는 국영수같이 하나도 쓸모없는 과목을 푸는 것보다 무속 공부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 생각해.”
“그 올곧음이 부럽구나.”
“너도 무당이 되면 좋을 텐데.”
“미쳤어?”
“아니. 내 말은 우리 같이 일하면 서로 상부상조하고 많이 만나니까 좋잖아.”
“그래도 나는 절대 무당은 싫어.”
“근데 너 아직도 영안 안 없어진 것 보면 슬슬 신내림 받아야 할지도 몰라.”
지영이 수연을 노려보자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었다.
“그래, 미안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너 진짜 아픈 데는 없지?”
“없어. 공부나 해.”
커가면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과가 추가된 것도 수연의 걱정 때문임을 알고 있었지만, 지영은 그런 배려가 더욱 기분 나빴다. 지영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신 같은 존재에 자신을 귀의하지 않고, 남들처럼 소속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무심했다. 집에 돌아간 그날부터 큰 열이 나기 시작했다.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내려가지 않았고 오히려 심해지기만 했다. 수연의 어머니가 찾아와 엄마와 이러저러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지영은 그 소리에 더욱 이골이 났다. 수연이 굳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너 자꾸 그렇게 고집 피울 거야?”
“무당 안 돼도 된다고 했어. 분명 그랬단 말이야.”
“고집 좀 그만 부려, 제발.”
몇 날며칠 열이 지속될 동안 수연은 지영에게 신내림을 강요했다. 그러나 꿋꿋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긴 시간 끝에 마침내 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봐, 그런 거 안 받아도 괜찮아졌잖아.”
“이번엔 운이 좋아서 빨리 나았지만 더 심해지면 차도가 없어.”
“그래도 신내림은 안 받아.”
“어휴, 그래 금쪽아. 내가 졌다.”
수연이 지영의 침대 위에 책 한 권을 던졌다.
“이게 뭐야?”
“성경.”
“웬 성경. 그새 분야 바꿨냐? 수녀 되려고?”
“내가 미쳤냐?”
“그럼?”
“너 보라고. 성경이라도 읽으면 나아질 수 있대. 너는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신을 못 믿으니, 방법은 신을 속이는 거밖에 없지. 내가 이런 말 하기도 뭐 하다만.”
“성경을 읽으면 신을 속일 수 있어?”
“일단, 그거라도 신실하게 읽으면.”
지영이 어벙한 표정으로 성경을 펼쳤다. 빼곡한 글자에 얇은 질감의 종이가 기분 좋게 손에 감겼다.
“쉬운 길 내버려 두고 어려운 길로 가려는 것도 재능이다.”
수연이 뭐라 하든 간에 지영은 책장을 계속 넘겼다. 빼곡하게 가득 찬 글씨에 엄청나게 두꺼운, 파스텔 색깔의 표지로 둘러쌓인 작은 책. 그 한 권이 자신의 병의 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고마워. 색도 예쁘다.”
“너 초록색 좋아하잖아. 보라색이랑 고민하다 그걸로 샀지, 뭐. 엄마는 엄청나게 싫어했지만. 어쩌겠니.”
“너밖에 없다.”
“그래, 받들거라!”
수연은 지영이 자신의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가 앞으로 아프지 않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영의 운명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예상치 못했다. 지영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실종됐다. 그들이 열여덟 살이 되던 겨울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