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아, 엄마 내일 결혼식 있어서 서울 가려고 하는데 딸 집에서 좀 있어도 될까? 시간이 뜬다.
됐고, 김소연 너 진짜 명심해. 집 비밀번호 부모님한테 알려주지 마라.
진희의 말이었다. 이게, 독립했다는 나의 말에 대한 그의 밑도 끝도 없는 최초의 응답이었다.
사생활 간섭… 뭐, 그런 거 때문인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은 그 순간에도, 정작 중요한 말은 놓친 것 같은 묘한 불안이 있었다. 그때 걔가 뒷말을 얼버무린 것 같았는데 다시 물어보니 됐다, 나쁜 것도 아니고. 라면서 말을 돌려 버렸다.
엄마의 전화에 왜 갑자기 그때 그 말이 생각나 버린 것일까. 아무쪼록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말임에는 분명했다. 어쨌거나 우리 엄마는 딸 사생활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이유 없이 엄마를 오지 말라고 할 순 없었으므로 나는 순순히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
[엄마 먼저 간다. 잘 챙겨 먹고 지내.]
집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고, 어두웠다. 엄마는 문에 쪽지 하나를 붙여두고 돌아갔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가지 기껏 와 놓고. 한 손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한 손으로 불을 켜는 찰나의 시간, 이상 기운이 느껴졌다. 기시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익숙함. 그럼에도 내 집이라기엔 너무도 생경한.
집이... 엄마 같다.
“엄마! 나 지금 집에 왔는데, 왜 벌써 갔어? 쪽지만 남기고. 문자를 하지.”
- …
- 밥 잘 먹고 다닌다며.
분명 타박이었는데, 기이했다. 엄마의 목소리엔 화가 아니라 다른 게 담겨있었다. 아무 잘못도 없으면서 내게 미안하다는 말투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니, 엄마, 그게 아니라, 목 끝까지 차오른 말에서 어떤 것도 고르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도무지 그 목소리엔 어떤 대답도 어울리지가 않았다.
화장실에 곰팡이가, 창틀에 먼지가, 바닥에 머리카락이 사라졌다. 미뤄둔 설거지도, 먹다 남겨둔 커피도 사라졌다. 건조기에 그대로 있던 빨래들이 개켜있다.
엄마 미안해. 그 말은 내가 고를 수 있는 말 중에서 가장 골라서는 안 될 말이 될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네가 뭘 미안해, 그럴 것이다. 엄마가 미안하지, 그럴 것이다.
그 말 때문에 아무 잘못 없이 미안해하는 엄마는 미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엄마도 나도 서로에게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로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우린 서로 혼내지 않았고 혼나지 않았다. 그런데 잘못했다고 말한다. 우리를 혼낸 건 누구일까. 무엇일까.
-김소연이가 웬일이래 전화를 다 하고
“야. 집 비밀번호 부모님한테 알려주지 말라는 거 그거…”
-응. 그거야 그거. 기어코 알려줬구나 내 말을 귓등으로 듣더니.
... 동생이 그러잖아, 나 없을 때 엄마랑 아빠랑 우리집 와서 냉장고에 물만 있는 거 보고 아빠가 울었다잖아. 그 이후로 부모님 온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일부러 냉장고 채워넣는다 야. 우리 다 잘 사먹는데 괜히 그런다니까 ... 소연, 너 왜 그래? 괜찮아? ...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진희의 목소리 때문에 자꾸 앞이 흐려진다. 냉장고엔 엄마가 가져온 반찬들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