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고향은 소래입니다. 인천에 있는 소래포구의 한 아파트에서 8년 동안 바다 비린내를 맡으며 거주했었습니다. 병원 하나를 가려 해도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야 했던 저는 초등학교에 입할할 때 즈음에 간석동의 한 아파트로 이사 갔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 지역에서는 5일장을 열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촌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6년에 중학교 3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다만, 저는 한 아파트 단지에서 단지로 이사를 갔던 경험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제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무렵 이사 온 한 가정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처음에 윗집에서 이사를 왔다며 시루떡을 가지고 아이 두 명과 함께 엄마의 또래가 되어 보이시는 분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들이 뛸 수 있으니 시끄러우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고 올라가셨죠. 그때는 몰랐습니다. 새롭게 이사 온 가정집이 저희 집에 엄청난 층간소음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걸요.
이사 초반에는 나름 신경을 쓴다고 잠잠했던 윗집은 어느 순간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심각하게 쿵쿵대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쯤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울려왔고, 친구가 놀러오는 날에는 술을 마시는지 온 거실에 왁자지껄한 소리가 가득 찼습니다. 오죽하면 윗집이 너무 시끄러웠던 나머지 아랫집에서 저희 집으로 인터폰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어린 저는 그 인터폰을 받고 “죄송합니다.” 사과를 했는데 그 모습을 본 부모님은 저에게 “왜 우리가 낸 소음이 아닌데 네가 사과를 했느냐. 아랫집이 오해하지 않겠느냐.” 라면서 다시 인터폰을 하여 윗집에서 내는 소리라고 해명을 했죠. 저희 집은 소음을 어떻게든 견디려고 했습니다. 아주머니와 마주할 때마다 새벽에 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아주머니는 사과하고의 반복이었죠. 결국 지친 것은 엄마였고 우리는 새로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내놓고 세입자가 집을 구경하러 올 때마다 윗집에서 소음을 내는 것은 아닐지 전전긍긍하였고, 결국 집을 팔아버리고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동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소음에서 도망치기 위해 ‘회피’했고 이사를 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소음 하나 없는 쾌적한 집을 되찾았다는 생각에 기뻐했습니다. 다만 소음을 피하니 ‘결로’라는 문제와 부딪히게 되었지만요.
두 번째 일화
역세권 청년주택에 산다는 것은, 역세권의 탁월한 입지 조건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탁월한 입지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고? 역세권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역세권이란 말이지.
맛집, 카페, 술집,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모이고 만인의 약속 장소가 되는 OO역 N번 출구 옆에 산다는 것. 그건 불금과 불토가 되면 어김없이 창밖으로 들려오는 주취자의 흥을, 그것이 무엇이든 무시해야만 잠들 수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밤과 음악 사이에 술과 안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대들은 길을 걸으며, 혹은 우리 집 앞에 모여 소리를 지르시는지? 헤어지기 전 지하철역 앞에서 인사를 했을 뿐이라고요? 아아… 역세권이여.
↓ 창 밖의 주취자들과 이 노래 같이 부르면서 잠든 적 있을 유 ↓
세 번째 일화
집 앞 공원 공사팀과 석 달째 눈치 게임 중이다. 첫 달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오전 내내 내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방을 흔들더니, 저번 달은 월 화 금 일 내가 가장 평온한 휴식의 순간을 맞이하려는 찰나에 흔든다. 이번 달은 일주일에 두 번 예상치 못했던 시간대에 신명 나는 리듬을 선사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게 마치 지뢰 밟듯 아차 하는 순간 나를 흠칫하게 했다.
새롭게 단장 중인 공원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나만이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오랫동안 가꾸어온 공원 사용법이 있었었는데... 우리 동네를 흔드는 거대한 진동은 오늘도 조금씩 나의 추억도, 나의 휴식을 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