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전쟁으로 황폐화된 일상은 복구되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인공적인 소리들이 세상에 가득 찼고 소음에는 급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좋은 소음, 교양있는 서울 사람들이 감수하는 소음, 다른 사람이 들을 때 불쾌할 수 있지만 나는 좋아하는 소음 등등등. 타인의 청력으로 결정되는 소음의 가치란 다시금 사람들을 불통의 늪에 빠뜨린 것이다. 요컨대 세상은 大 소음 콘텐츠 세상을 맞이했다.
내가 가공하는 소음은 몇 급일까?
이 아름답고 병약한 자본주의 사회는 소음에도 값을 매기기 시작했다. 놀라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음속을 따라잡고 소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우리에게 소음은 이제 상품에 불과했다. 호의는 둘리가 되었다.
내가 그토록 고생하며 재가공한 소음은 저작권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름 모를 누군가의 돈벌이로 전락했다. 전쟁의 승자는 소음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음 전쟁 이후 규제가 더욱 심해진 지금. 소음 삭제에 대한 의뢰를 받은 내가 간 집에서 내가 만든 소음을 삭제하는 기분이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은, 이제 그들이 어떤 짓을 하던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일까.
죽음의 5단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나는 내 소음이 소음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분노했고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는 소음 피커가 되기로 타협했다. 돈을 버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일에 열중했던 것도 잠시, 의뢰자의 깜찍한 짓거리에 당한 나는 매너리즘과 함께 우울의 파도 에 휩쓸렸다. 이미 다섯 단계 중에 네 단계의 절차를 밟은 내게 남은 일이라고는 이제 수용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때마침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피커피커에 등록된 새 게시물이었다. 알림에 뜬 한 줄짜리 어그로성 제목에 솜의 손가락이 저항 없이 핸드폰 화면을 눌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