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한 정신 속 익숙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시야,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결박된 몸과 덜컹거리는 차까지 기시감이 들었다. 문득 강렬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 나 지금 납치당하는 중이구나. 지영은 자신의 계획이 꼼짝없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더불어 실패의 결과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란 사실도. 또다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가만히 있었으면 더 나은 마지막을 장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닳을 대로 닳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다 최악의 결과를 내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현실감이 없어지고 알딸딸했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현재의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암담해졌다.
한탄하다가 사실 그녀의 인생이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이 미웠다. 원치 않게 신병이 걸리고, 원치 않게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았다. 신을 믿지 않아서인지 납치라는 불행을 겪었고, 기억을 잃었다. 트라우마는 없었지만 기억을 잃은 이후 많은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살아있는 시간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극도로 소심해졌고, 또 침울해졌으며 그럴 때마다 자주 실수를 했다. 자신의 문제로 인해 현실에 부주의해지면 의도치 않게 대형 실수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회사에서 잘렸다. 기어코 들어온 새로운 회사는 살인청부업체였다. 다른 사람들은 인생이 너무 평탄해서 무료함을 느끼던데 지영은 인생이 너무 극적이라 공허했다. 연극처럼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되어 굴러가는 것 같지 않나. 죽을 날을 미리 받아놓고 삶의 일력에 사건을 기재한 대로 막 굴러가는 느낌이다. 발버둥 칠수록 나아지는 건 없고 결국 끝은 이른 죽음이라는 상상이 지영을 괴롭혔다. 망상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신은 자신이 친절하고 싶을 때만 친절하고 아무렇지 않게 불행을 주었다. 나아지려는 하찮은 움직임은 결국 업보가 되었고 끝없는 어둠에 갇힌 것만 같다. 세상이란 이렇게도 암담한 것이었다.
결국 지영은 현실에 순응했다. 그저 운반되면 운반되는 대로, 없어지면 없어지는 대로 그렇게 자신의 인생은 ‘결정될’ 예정이니. 이윽고 차가 멈추었다. 트렁크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지영을 등에 업었다. 머지않아 지영의 몸이 의자에 맞게 고정되었다. 납치범이 안대를 벗겼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강렬한 빛이었다. 곧 빛에 익숙해진 눈으로 납치범의 인영이 보였다. 지영은 숨을 들이마셨다. 납치범은 나이프였다. 포크가 아닌 것이 의외였달까.
“일어나 있었군요.”
“⋯⋯.”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죠?”
“⋯⋯.”
“여기까지 온 순간 이런 건 별로 중요치 않을 텐데 괜한 말을 꺼냈군요.”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나이프가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단박에 죽으면 호상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뭐라고요? 하하하. 지영 씨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생각이 참 독특한 구석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키친에 들어올 때부터 그랬죠. 포크가 만든 이상한 전단지를 보고 진지하게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지 않나, 세상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충실하게 시체 처리를 하지 않나. 키친의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죠. 그렇게 호의적인 사람들은 아닌데 말입니다.”
“겨우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납치하신 건 아닐 텐데요.”
“그렇죠.”
“여쭈어도 된다고 하셨으니 궁금하네요.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요.”
나이프는 곤란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 거렸다.
“저를 어떻게 하실 속셈이시죠.”
“아무것도.”
“⋯⋯.”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예정이니까.”
“‘지금은’ 말이죠.”
“그래요. ‘지금은’ 말입니다. 사실 그 지금도 촉박할 것 같지만, 막간을 이용해 옛날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해요.”
“옛날이야기요?”
“네. 아마 지영 씨가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요.”
지영의 뒷골에 소름이 스쳤다.
“제가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라면⋯, 설마.”
“그래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2년의 공백. 그리고 그 기억의 주인공 난희. 그녀의 이야기말입니다.”
지영이 갑작스레 나이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모의 이름에 당황하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고모가⋯ 그 일과 연관이 있나요?”
“그럼요.”
“.설령 고모가 그 일과 연루되어있다고 해도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제게 그 일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죠.”
“저는 그녀의 연인이었으니까 일부의 책임이 있습니다. 농담이지만 당신의 고모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미쳤어.”
지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지금 와서 고모의 이야기를 한다고 무엇이 달라지죠?”
“달라지는 건 없죠. 단지, 저는 속죄를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속죄요?”
“저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지영 씨의 2년을 희생했으니까요. 어때요. 이젠 조금 궁금해지지 않으셨나요?”
지영은 회한의 눈에 잠긴 석화의 얼굴이 지쳐있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포기한 공백의 이야기를 통해 무책임한 사죄를 요청하는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 건 그래서다. 지칠 대상이 잘못된 것 같아서. 지영은 오히려 담담해졌고 억울해졌다. 어째서 당신이 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그 공백 때문에 괴로웠는데 어째서 당사자인 나보다 당신이 더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가.
“시간이 없다면 빨리 이야기해 주세요. 그건 당신 것이 아닌 제 것이니까.”
그래서 끔찍할 것이 분명한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