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 씨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요동이었다. 불과 몇 분 전의 비일상적인 사건에 휘말린 사람이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 이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얻어맞았긴 해. 근데 기분이 상냥하긴 해. 이게 양립가능한 거야? 수호 씨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눈을 보니 알겠다. 저 맑고 따가운 눈을 왜 못 알아봤을까. 고개를 돌려 자신과 눈을 맞춘 이 사람, 2월 29일의 그녀. 어쩐지 그래, 친해지고 싶었다니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뭘 쪼개요. 글렌체크 이거 그쪽 거 맞냐니까.”
“…아, 네… 네?”
“이 CD 그쪽 거 맞죠?”
진 씨가 한 손에 글렌체크의 앨범 한 장을 흔들며 말했다. 그 말에 수호 씨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네’에서 ‘예’ 사이의 바람 빠진 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대답하느라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기미가 없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올라간 눈썹, 그리고 또 잠깐 흔들리는 눈동자.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당황하는 모양은.”
하하하, 못 참겠다는 듯 웃어버린 진 씨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뭘 쪼개냐는 무례한 말에는 의아해하지도 않고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 4년 전과 똑같다.
“아, 뭐야. 깜짝 놀랐네. 기차 맞죠? 그렇죠? 난 또 혼자 별생각을 다 했네. 맞아서 착각이 늘었나 했다.”
“그건 그렇고, 어딨어요? 내 빨간 앨범. 지금 CD 줍다가 딱… 와 그거 팔려고 여기 들고 왔으면 진짜 돌려차기였는데, 아까 그런 일도 있었고 하니 솔직하게 말해도 봐줄게요. 혹시 진작 갖다 버린 건 아니죠? 그게 지금 가치가 얼만데.”
집에 있어요.
“돌려받고 싶었던 건 맞아요?”
불쑥 튀어나온 말은 다른 말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거라고 말하면서 왜 연락을 안 했어요? 내가 준 번호는 그냥 버린 거죠? 시드니에서 만나자는 소리도 그냥 해본 소린 거예요? 그쪽은 시드니 가긴 간 거예요? 나는 못 갔어요. 모르겠어서요. 나만 붙잡고 있는 걸까 봐요. 돈도 없긴 했어요. 진짜 갔는데 나만 거기에 간 거면 어떡해요. 나만 생각하고 있던 거면 어떡해요. 나만 소중했던 거면 어떡해요.
하나의 질문 뒤에 발화되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수호 씨는 잊어버리지 못해서 잊고 싶었다. 피하고 싶어서 그날의 약속을 잊은 척했다.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 2024년의 2월로부터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수호 씨 책상 위의 달력은 2월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겁쟁이.
“당연한 소리를. 넬 인디 1집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내 보물이에요.”
“보물을 그렇게 아무 사람한테 막 넘기는 사람도 있나요.”
“…필요한 사람은 아무 사람이 될 수 없지.”
조금의 정적 뒤로 진 씨의 말이 이어졌다.
“필요했잖아요. 그래서 빌려준 건데.”
알 수 없다는 듯한 수호 씨의 얼굴을 보던 진 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껴서요. 내 보물이 소중하니까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 사람한테 빌려준 거예요. 나는 그런 식으로 아껴요.”
“그게 뭐야.”
“그게 뭐긴.”
수호 씨는 그날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렸다. 그랬었나, 그랬겠지. 꽤 처참한 모습이었을 거야. 누군가의 마지막을 보는 일이 기쁜 일은 아니니까. 오는 길에 수호 씨는 창문에 기대서 엉엉 울어버렸다. 참는다고 참아지지 않아서 크게 울어버렸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그 소리를 불쾌해했다. 곧 승무원이 찾아왔고 조용히 해주기를 당부했다. 수호 씨의 소리가 싫었던 대각선 자리의 승객은 중재가 이루어지는 와중에도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열차가 터널을 지나고, 승무원은 말하고, 승무원 뒤로는 들으라고 하는 사람들의 혼잣말들이 말해지고,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안 그래도 귀가 먹먹해진 수호 씨는 도통 듣지 못하고 있었다.
복도 쪽에 앉은 옆자리 사람은 휴지를 밀어 넣고 수호 씨 대신 승무원에게 말했다. 힘든 일 있나 봐요. 네네. 조용히 해야죠. 알겠습니다. 그리곤 CD 플레이어와 이어폰을 수호 씨의 손에 쥐여주었다. 손길은 친절하고 눈빛은 단호했다. 손길은 둥그런데 눈빛은 뾰족했다. 그 눈이 수호 씨의 눈동자를 쫓았다. 수호 씨의 물기 어린 눈을 피해 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보물아 돌아와라 하면서 돌아올 구석 잘 남겨 놓고 기다리는 거까지 해야 소중한 거죠. 그렇게 미련 없어 보이면 보물이 어떻게 돌아갈 생각을 하겠어요.”
수호 씨가 괜히 민망해서 말꼬리를 잡았다. 떠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만 소중했던 건가 싶어 심술을 부리고 싶기도 했다.
“하여간 진짜 재밌는 사람이야. 본인이 안 왔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안 왔잖아, 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