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변고 없이 성공적으로 퇴근을 마쳤다. 그것만으로 하루를 잘 보낸 기분이 들었다. 하루 종일 긴장하고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잠은 솔솔 왔다. 그리고 길었던 오늘은 지영의 꿈에서도 다시 반복했다. 뭐 그런 게 있지 않는가. 자신이 처리한 시체가 살아 움직여 그녀를 죽인다든지, 아니면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도망치고 있다든지. 다행히도 그런 꿈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어떠한 넓은 부지 속에 있었다. 한국에는 절대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저택, 그곳에서 지영은 길을 헤매고 있었다.
첫 시작은 정원이었다. 한껏 조형된 풀들이 자신을 뽐내며 위풍당당 정원을 밝히고 있다. 그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차고이다. 차고에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류의 차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신의 위세를 뽐내듯 으리으리한 자태를 과장하는 것이 바깥에 있던 풀들과 다를 것 없다. 종국에는 거대한 저택의 1층에 도달한다. 그 저택은 가운데가 사각형 구조로 뻥 뚫린 건물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나올 것 같은 독특한 골조를 지닌 사방에 방이 가득한 복잡한 구조의 저택. 그곳에서 지영은 갈피를 잃고 걷고 있었다. 걷고 걷다 보면 4층으로부터 누군가가 떨어진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 지영의 등이 불콰하게 젖어있다. 알람이 울리기까지 세 시간이나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아 지영은 평소보다 이르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출근이다. 누군가는 욕하는, 중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출근이다. 물론 지영에게는 절대 불가결한 계약 일자가 있기에 품에 안고 있는 사직서를 단박에 제출하진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 굴레 또한 멈출 것이다. 이제 겨우 2개월 남았다. 2개월. 그것만 견디면 된다. 지영은 일어난 김에 조금 일찍 출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찍 출근했지만 가게 마감에 맞추어 퇴근한다. 막차를 탄다. 지하철이 끊기기 5분 전, 여유 있게 승강장에 도착한 그녀는 우울한 발걸음으로 탑승구 앞에 선다. 막차 글씨를 깜빡이며 들어온 열차는 한적하다. 몇 없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객실에 앉아 있었고, 술 냄새는 이곳을 점령한 지 오래. 지영은 수라장의 한복판에 앉아 있는 행색이 남루하고 지쳐 보이는 젊은 남성 승객을 피해 가장 끝자리를 쟁취했다. 지하철역에서 5분, 회사까지는 30분. 완벽한 위치의 집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또다시 출근이다. 내일은 다희와 함께하는 야근도 있었으니 어찌 보면 더 고될지도 모른다. 다시 잠에 든다. 지겨운 반복은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지영은 몸을 뉘며 또다시 센치한 생각에 잠긴다. 이 굴레를 과연 2개월로 끊어낼 수 있을까. 당연히 벗어나고 싶지만, 지영에게는 애초에 벗어난다는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의 고민을 안은 시간은 빠르게 사람을 나른다. 지영은 한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10구의 시체를 처리했고, 어느덧 레스토랑의 어엿한 정직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실수는 거의 없어졌다. 처음에 못마땅하게 보던 정우도, 조금은 걱정스럽게 저를 챙겨주던 사수 다희도, 안 그러는 척하지만, 불안한 눈빛으로 살펴보던 성화도 요즘에는 저를 신입처럼 챙겨주지 않는다. 지영은 그 속에서 묵묵히 제 일을 할 뿐이다. 한 가지 의뭉스러운 것은 퇴사일이 머지않았음에도 아무 말 없는 도윤이다. 지영은 다짐했다. 기필코, 품 안의 사직서를 저 반질한 얼굴에 던지고 나가리. 지영이 키친에서 일하며 얻은 것이라곤 그런 배짱넘치는 망상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은 이미 지영의 앞에 택배로 도착해 있었다. 사건은 언제나 급격하게 하지만 잔잔하게 발발했다.
모처럼의 휴일에 느지막이 일어나 티타임을 즐기는데 난데없이 티스푼에서 엉뚱하게 살기가 느껴졌다. 속히 자리를 피하자 티스푼이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 그대로 꽂혔다. 티스푼이 꽂혔다는 표현이 제법 웃겼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티스푼이 꽂힌 의자의 쿠션도 장렬히 사망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잠해진 티스푼을 뽑아 싱크대에 넣자, 이번에는 냄비 뚜껑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싱크대 아래로 몸을 숙이며 가까스로 피하자, 타깃을 잃은 냄비 뚜껑이 처절하게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이윽고 온갖 물건들이 지영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하자, 마침내 그녀는 외쳤다. 아이고, 인생이야! 그녀는 그렇게 집에서 쫓겨났다.
지영은 드디어 제가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카페에 앉아서도, 하염없이 커피를 바라보면서도,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대해 곱씹으면서도 올 것이 왔구나, 각오할 뿐이다. 그녀로서는 드물게 초연한 상태였다. 첫 시작도 이 아메리카노에서 시작됐다. 오천 원이 는 아메리카노를 마음 편히 먹고 싶어서, 일을 찾았다. 오천 원이 지영을 송두리째 바꿨을 줄은 과거의 지영도 알지 못했을 거다. 핸드폰을 들어 오랜만에 연락처를 뒤적거려 본다. 전화할 수 있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은 낡은 전화번호부는 바래지도 않고 이름마다 고유의 숫자를 간직하고 있다. 지영의 손이 멈춘 것은 수연이라는 이름이 적힌 전화번호 앞이었다. 전화번호를 누르자 신당의 홍보 문구가 컬러링으로 들려온다. 이 컬러링을 듣기 싫어서 연락을 꺼리던 때도 있었는데, 오히려 지영은 컬러링을 들을수록 안정을 느꼈다. 이제야 할 일이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웬일이냐, 서지영.”
“의뢰할 게 있어서.”
사실, 더는 못 참을 것 같아서.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것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야만, 지영은 퇴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지, 어째서 도윤은 자신을 키친에 영입했는지, 저택은 어떤 곳인지, 그리고 계약서의 기묘한 불꽃부터 시체를 처리할 때마다 드는 그 평온하고 꺼림칙한 기운은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여전히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렇기에 지영은 그 속으로 깊이 침전하기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