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 Opening (10/27) 🆕
은강 - 이주가 시작된다 (10/27) 🆕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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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오늘은 우리 집 상영관에서 어떤 나를 마주하게 될까?
때론 사람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다. 답답한 마음에 영화를 한 편 본다고 해서 인생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집 1인 상영관은 불필요하게 무성해진 감정들의 가지를 다듬어 주었다. 상영관을 나서는 나를 조금 더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때론 현실 속에서 나를 잃어갈 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내 나이가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넘어갈 때쯤 ‘나의 감정에도 보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조절되지 않는 감정들이 힘들었다. 특정 감정의 과다, 부족 현상이 매일 같이 일어났고 거기에 나의 상상력은 기름에 불을 지폈다. 한 방울의 우울함이 있었다면 그 일을 계속 생각하고 최악의 상황까지 제멋대로 상상을 해버리며 스스로를 슬픔의 파도 풀로 밀어 넣었다. 자연적인 파도는 잔잔해질 때도 있지만 파도 풀에서 만들어 내는 인공적이며 일정한 파도는 매번 거침없는 일정한 고통을 주곤 했다.
감정조절이 어렵다 보니, 감정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타인을 갈망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를 100퍼센트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이지만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할수록 갖고 싶은 것처럼, 나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일생을 헤맸다. 나를 이해해 줄 법한 상대가 나타났더라도 특정 계기로 그 사람에게 실망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예민한 걸까?’라며 자책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힘든 일이 생겨도 잘 털어놓지 않는 성격으로 자라게 되었다. 억지로 각종 감정들을 소화제와 함께 입속으로 한 움큼 털어 넣어 혼자 해결하기도 했는데 그 방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매번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감정들을 다스릴 수 있는, 조금 더 편안하고 행복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쉼 없이 소란스러운 감정들로부터 도망치듯이, 집에서 가장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고 문을 잠갔다. 그렇게 나의 첫 상영관을 오픈했다.
우리 집에선 아직 내방이 없지만 제일 조용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어떤 방이 있다. 옛날 물건들을 쌓아두는 방인데, 그날의 기분에 따라 원하는 물건을 한 가지 고를 때도 있고, 아무 물건이나 손에 우연히 잡히는 날도 있다. 물건을 손으로 잡아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읽어보고, 낡아버린 촉감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그 물건이 살아 있었던 과거의 시간대로 멀리 떠나버리곤 한다. 그때부터 상영관은 캄캄해지고 무형의 스크린이 생기며 영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던 날부터, 받아쓰기 열 개 중 여섯개를 틀려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았던 날들까지... 잊고 살았던 날들이 한 장면, 한 장면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한껏 영화에 집중을 하다보면 그 당시에 내가 지었던 표정을 똑같이 하고 있다. 상을 받은 날엔 광대가 볼록 올라올 만큼, 하지만 앞에 나서는 것이 부끄러워 입은 작아진 상태로 다소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감정의 파도 풀에 나를 밀어 넣을 필요도 없었고 두꺼운 알약과 같은 감정을 억지로 삼킬 필요도 없었다.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며 당시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 박자 정리가 되곤 했다.
자신감이 부족할 땐 모아두었던 상장들을 보며 ‘나는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이지’, ‘나는 이렇게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반대로 분노나 억울함, 증오가 치밀어 오는 날엔 응원받고 축복받았던 날을 찾았다. 생일날 친구들에게 받았던 종이 편지들, 유치원을 졸업할 때 선생님께서 주신 열기구 모양 편지지... 그 편지에는 앞으로도 어린 내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여린 민들레 같은 마음이 한 자 한 자 담겨있었다. 눈으로 고운 글씨를 따라가다 보면 난 한순간에 선생님께 열기구 모양의 편지지와 사탕 목걸이를 받으며 무해한 미소를 짓는 어린 내 모습이 보이고, 이를 조용히 관람한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증오를 잠시 떠나보내고 그 자리를 행복과 격려로 채우곤 했다.
어릴 때 하던 상영관 놀이를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픽’ 하고 웃음이 흘러나온다. 아직도 이런 아이 같은 놀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퍽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은 1평 남짓한, 소리 없는 1인 상영관. 내가 어떤 영화를 보는지는, 유일하게 내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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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집의 추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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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의 이사 때문에 짐 정리를 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 왔던 많은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세월을 먹었고 세월에는 기억이 스며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에 세월의 흔적을 남길수록 기억은 집안 곳곳에 붙들려 있게 된다는 걸 알았다.
유진의 글은 방문을 열며 시작된다. 그는 그 방의 물건들을 통해 지나간 기억을 반추한다. 그 기억은 “소화불량처럼 고생하는 결말”을 갖고 있기도, “행복과 격려”를 주는 기억이기도 했다. 방에서는 물건 하나와 기억 하나가 한 편의 영화가 되어 유진의 삶을 상영한다.
사람의 인생은 영화와도 같다. 우리는 바깥의 장면들을 집 안으로 하나씩 하나씩 가져오고, 그 장면들은 따로 또 같이, 정말로 감동과 분노와 슬픔과 웃음이 공존하는 하나의 대서사시를 만들어 내게 된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옷장 문이 열리듯, 유진의 세계는 방문과 함께 열린다. 유진의 세계는 나의 세계와 분명 다를 테지만 그 세계의 어떤 날들과 어떤 감정은 나의 세계의 그것들과 분명 같을 것이다. 지나온 수많은 기억에 담긴 ‘그날’들을 마주한다면 우리는 어떤 감정이 될까? 유진의 섬세한 글들이 이 물음에 답을 전한다.
- 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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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관, 다양하고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관찰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는 스크린을 통해 건조하게 이야기가 전달되지만, 감상자들은 각자 나름의 감상을 가지고 나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종이에 갇힌 활자가 독서를 통해 온전히 뇌에 전달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짜릿한 해방감과 함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과 가히 닮아있을지도, 아님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장소일 수도 있다. 유진의 글을 읽다보면 당신의 세상에 내가 편입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몰랐던 일상에 빠져들도록 매료하고, 그곳에 무섭도록 투영되도록 도와준다. 유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글을 읽다보면 그녀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갈 수 있다. 유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독자 또한 이야기를 통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유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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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상영실이 매개하는 한 사람의 역사'
어떤 모습이든 집은 나를 품어주며, 흔적을 쌓아간다. 흔적은 언제든지 그떄의 순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무심코 지나가는, 혹은 눈길을 주지 않았던 일상적인 공간이라도 감정을 확장시키는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취향을 찾아가고, 편리한 삶을 추구하는 보통의 삶 속에서 나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나에게 필요한 안식처로서 새로운 용기를 주는 작가의 1인 상영실이 흥미를 자아낸다.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과,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의 생생한 감정 묘사는 내면의 감정 소용돌이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공허함을 위로하기도 한다. 특히 1인 상영실은 한 사람 역사의 현대와 과거를 매개하는 상징물로 회상의 힘을 경험하는 경이로움을 준다. 스쳐 가는 순간이지만 개인의 훈장과 흔적을 상기시키며 따뜻하게 삶에 대응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 윤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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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을 다녀왔는데, 문 앞에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있었다. 등기가 아닌 이상 우편물을 집 앞에 두고 가는 일은 없는데. 등기가 올 일은 없고, 무척이나 중요한 서류인가 보네 하고 생각하며 보낸 이를 확인하니 ‘한남 제3재정비촉진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조합’이라고 적혀있었다. 받는 이에 내 이름은 틀리게 적혀있었다.(사실 나는 이 집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이름으로 된 공과금 고지서나 여타 우편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만 그런가? 어째서 확정일자를 받고 전입신고를 해도 고지서의 거주자 이름은 바뀌지 않는 걸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물 사용자 님’이라고 적힌 수도 요금 청구서를 받는다) 올 게 왔구나.
캐리어를 대충 던져두고 우편물을 뜯어보았다. "제목 : 관리처분계획인가·고시에 따른 이주 안내 등. 거주(점유)자님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우선 한남3구역 재개발정비사업으로 인하여 거주(점유)지를 이전하여야 하는 불편을 드리게 되어, 양해의 말씀드립니다. 3. 한남3구역 재개발정비사업은 초대형 사업지이며...(중략) 4. 이에 당 조합에서는 정해진 이주기간 내에 거주(점유)자들의 이주가 완료될 수 있도록 부득이 거주(점유)자 모두를 대상으로 사전 명도소송 등의 법적인 대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임을 '아래'와 같이 안내드립니다." 요약하자면 재개발 사업에 방해되지 않게 알아서 제때 나가라는 뜻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한남3구역이 한남동 재개발 구역 중 제일 진행이 빠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집주인이 계약 당시 재개발이 시작되면 지체하지 않고, 이사비도 별도로 청구하지 않고 군말 없이 이주할 것을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고 계약서 특약사항에도 강조해서 적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3년 내내 이주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재개발이 아니더라도 이 집에서 겨울을 한 번 더 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3년 내내 수도가 터지지 않고 무사히 겨울을 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보일러 온도조차 제대로 조절되지 않아 난방비 폭탄을 맞기 일쑤인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의해서 강제로 밀려나는 경험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뭐랄까. 나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까지 떠미는 느낌이랄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번 재개발 사업으로 한남3구역에 살고 있는 약 1만 가구가 움직일 예정이다. 그 영향으로 강북권 집값도 들썩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인데,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1만 가구가 서울 바닥 어딘가에는 흘러들어 가야 할 텐데, 재개발 구역의 전셋값이라고 해봐야 1억에서 2억 사이일 테고, 그 정도로 갈 수 있는 데는 뻔하지 않은가. 오래된 빌라나 연립, 다가구 같은 곳이겠지. 멀리 가는 것보다 가까운 곳을 선호할 테니 재개발이 덜 진행된 용산구의 다른 지역이나 중구, 성북구 쪽으로 갈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을까.
다들 어디로 갈까. 매일 퇴근길에 들르는 롯데마트 점원 분께 여쭤봤다. 재개발되면 이 마트는 어떻게 되나요? 여기는 끄떡없어요. 재개발이랑은 상관없지. 여기 사장이 이 5층짜리 건물 주인이니까. 재개발돼도 여기는 관계없어요. 그렇구나. 그대로인 것도 있구나.
우리 앞집 할머니는 어디로 가실까? 그 집에만 10년을 살았다고 했는데. 매일 새벽 길냥이 밥을 챙겨주는 이웃 님은 어디로 가실까? 만날 때마다 몇 살이냐고 물으시곤 마지막엔 교회 다니라고 호통치시는 옆 동 반지하에 사는 할머니는 어디로 가실까. 나는. 나야말로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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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집의 추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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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꼭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 산만한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하게 말하다가 가끔 툭툭 한마디씩 던지는데 그걸 너무 재밌게 말하는 사람들. 은강의 글 세 편을 읽고 나는 방금 말한 ‘그런 사람’ 앞에서 담담하고도 재치 있는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진 사람처럼 굴었다. 그의 글은 솔직하고 담백하고 곧다. 그러다 한 번씩 입에 감도는 감칠맛이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은강은 자기 앞에 놓인 재개발과 이주의 현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을 쓰고 있지도 않다. 썩 달갑지 않은 현실을 만났을 때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이든 느끼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이렇게 됐지”가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지” 일 때가 많다. 은강은 이주 명령 고지, 전세 매물, 보상 안내 우편물을 차례대로, 똑바로, 어떻게 할지 부딪혀 보인다. 경험과 생각을 담은 일련의 서술이 현실만큼 현실적이다. 재개발 구역에서 살아본 것도 아니면서 난 왜 공감하고 있지?
재개발과 이주를 둘러싼 ‘오늘의 한남’이 은강의 하루를 이룬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나요?" 은강은 한남동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
- 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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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수명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분명 누군가의 집도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시멘트를 통해 쌓아올린 건물일텐데, 어떤 건물은 살아있음에도 정해진 수명을 살지 못하고 흙 속으로 꺼져 버리고 어떤 건물은 굳건히 자리를 보존한다. 그리고 95년생, 나와 같은 나이를 가진 나의 집은 이제 곧 없어진다. <한남에 살다>의 첫 이야기 '이주가 시작된다'는 그녀가 이사를 가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분명 그녀가 처한 상황은 좌절스럽고 절망적일 터인데, 그곳에는 부정적인 감정만 남아있지 않다. 은강은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악착같이 일어선다. 자신의 걱정은 일단 제쳐두고 타인부터 생각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집중한다. 슬픔도 안타까움도 걱정도 모두 한 데 얽혀 글 속에 녹아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따뜻하다. 따뜻하다 못해 유쾌하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이지 않을까.
- 유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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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 같았지만 영원하지 않고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장소가 있다. 작가는 한때의 추억을 간직했던 곳을 떠나게 되며 나타나는 감정과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영원히 머물고자 한 마음은 없지만 어떤 이동이던, 익숙해지는 것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불가피한 이동이면 더욱이 그렇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도시, 아니 인생 모든 순간에서 작가는 독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선택이 가장 최선의 선택일까에 고민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공감을 더한다. 도시 개발의 복잡한 본질 속, 과거와 미래는 불안정한 공존을 만들어 낸다. 소설의 끝 나만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우리의 이야기임을 보여주는 구성은 확장성을 보여주며 희망과 불확실성의 사이 여운을 극대화한다.
- 윤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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