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1일, 모두가 잊지 못할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첫날.
모두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운 이 지독한 바이러스가 탄생시킨 수많은 이야기 중 유독 내 마음에 남았던 건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가정폭력범죄율이 코로나 이전과 비교했을 때 가파르게 높아졌다는 기사였다.
밖에 나가지 말고 집 안에 있으라는 메시지가 지구 곳곳에서 퍼지던 2020년 9월 30일, 이날은 비로소 내가 집을 나온 날이었다.
정확히 엄마와 아빠의 집에서 나온 날.
나의 모부께서는 대여섯 살 정도 되는 꼬마가 눈치챌 정도로 서로에게 차갑고 날 선 사이를 가진 부부였다. 그래봤자 꼬마는 꼬마인지라 유치원에 제출해야 할 어버이날 편지에 엄마 아빠 이제 그만 좀 싸우세요~ 라는 말이 남들이 알면 곤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눈치가 빠르진 않았다. 해당 부분은 지우고 유치원에 가져가야 한다는 엄마의 말 덕분에 그 사실을 제법 일찍 배울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이 세상에는 사이가 좋은 부부도 존재한다는 걸 친구들의 엄마 아빠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하루하루 체취가 술 냄새가 되어갔던 아빠. 그가 여느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 나올 것처럼 나와 동생, 그리고 엄마에게 심각한 폭행을 가했을까? 하면 그건 아니었다. 끝나지 않는 술주정, 지켜지지 않는 술 끊기 약속, 언어 폭행. 세간에는 다소 덜 심각한 애매한 폭행의 굴레였다.
물리적으로 내게 집의 일부를 제공해 주는 중년 남성의 술주정 정도는 사회가 생각하는 가정폭력의 기준에는 모자란 듯싶었다. 아빠는 딸들이 자신의 주정을 받아주지 않으면 신세 한탄과 질타를 했고 말끝마다 ~씨라는 욕설 같은 말을 붙였다. 같이 사는 강아지들에게도 이름 대신 개새끼라고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아마 애매하지 않은 폭행 수준이었다면 개새끼 대신 내가 썅년이 되었을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의 집에서 무난하게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선 주정을 받아내는 살가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 너그러움, 언어 폭행도 그러려니 넘어가는 단념이 의례적으로 가져야 할 조건이었을 지도 모른다. 당시 나와 동생은 그 집에 대한 전세금이나 월세를 그렇게 지불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아빠는 무자비하게 월세를 올리는 악덕 집주인일지도? 하하하~
때로 너그러움과 단념이 동날 때면 차라리 아빠가 날 죽도록 팼으면 좋겠다는 당황스러운 상상까지도 자주 했다. 그러면 경찰에게 신고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경찰에 신고한다고 아빠는 곧장 교도소로 구치되고 나는 자유의 몸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모르고 한 소리가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그저 어디라도 도움을 청할 곳이 간절했겠지. 오죽하면 그랬을까?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2015년 발매된 가수 자이언티의 꺼내먹어요 라는 노래를 처음 듣자마자 와닿았던 가사다. 아직은 20대 초중반, 앞으로의 미래, 경제적인 이유로 당장 집 밖을 뛰쳐나가는 방법을 보류하고 선택한 것은 내 방에서의 존버였다.
남의 집에 들어와 제법 뻔뻔하게 제 집을 짓는 작은 집거미처럼 아빠의 집에서 야금야금 나만의 방을 꾸려나갔다. 다행히도 아빠는 거미를 쫓아내지도 거미줄을 청소기로 빨아들여 버리지도 않았다. 거미 한 마리 정도에게는 공생의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너그러움과 단념을 지불한 보람이 있었다면 있었다.
이 방에는 술에 취해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사람도 없었고 빈번하게 약속을 무마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니, 들어올 수 없었다. 내 방의 가구원은 그래서는 안 됐다. 적어도 이 방에서만큼은 그런 자들을 들일 수 없었다. 적어도 방문이라는 호흡기만 가만히 둔다면 나의 방은 잠시라도 숨 쉴 수 있는 집이 될 수 있었다. 때로는 숨죽여 울고 분노하고 낄낄거릴 수 있었던 그나마 숨을 틔워주던 나의 보호구역.
하지만 연기처럼 사라지는 거미의 집처럼 다행이지만 초라한 나의 방 속 공기는 너무도 빠르게 바닥을 쳤다. 분노의 일기를 쓰며, 또 눈물의 그림을 그리며, 그러다 어떤 날은 그 눈물에 잠긴 채 누우면 평생 이 공간에서 살아야 하나, 내가 영원히 여기 갇히면 어쩌나 하고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방문을 영원히 닫을 수 없었으니까. 호흡기였던 안쪽 방문의 반대편은 나를 가두는 문이기도 했으니까.
더 이상 방문을 여는 정도의 고통에 대한 환기 정도로는 불충분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짐을 정리하고 모았다. 처음으로 집에 남기는 물건이 내 곁을 떠나는 물건이 되었다. 주로 닫은 적이 많았던 방문을 아주 크게 활짝 열었다. 내 곁에 두기로 한 물건과 함께 나가야 하니까.
2020년 9월 30일, 술 한 방울, 고기 한 점 없는 나의 첫 집을 예찬하며 크게 숨을 쉬었다. 코로나에 걸리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방이 집 안에 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