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은 오늘도 막차를 탄다. 지하철이 끊기기 5분 전, 여유 있게 승강장에 도착한 그는 우울한 발걸음으로 탑승구 앞에 선다. 막차 글씨를 깜빡이며 들어온 열차는 한적하다. 몇 없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객실에 앉아있었고, 술냄새는 이곳을 점령한 지 오래였다. 지영은 수라장의 한복판에 앉아 있는 행색이 남루하고 지쳐 보이는 젊은 남성 승객을 피해 가장 끝자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자아를 잃어버린 채 꿈나라에 든 여자의 횡포는 막지 못했다. 옆옆옆 자리에 앉아있던 여성이 돌연 자리에 드러누우며 제 자리를 침범했기 때문이다. 자세가 불편했는지 몇 번 몸을 들썩거리던 여자가 제 허벅지 양쪽에 자신의 다리를 안착시켰고 이윽고 잠잠해졌다. 도착지의 중반쯤 왔을 때 일이다.
지하철역에서 5분, 회사까지는 30분. 완벽한 위치의 집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그는 요 며칠 진심으로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얼른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고 싶다고 바라는 한편 들어가면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묘한 불안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빌라의 계단을 올라가며 지영의 등은 점점 식은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다달이 돈을 내고 정당한 권리를 누리며 사는 성스러운 자취방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평온한 일상 같은 것은 이미 그와 멀어진 지 오래였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도착한 3층.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뭉툭한 브레드 나이프가 맹렬하게 현관문 바로 옆에 꽂혔다.
"히익…!"
기겁한 그가 다시 문을 닫자, 이번에는 찬장에서 와장창 접시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들어오지 않으면 접시를 모조리 망가트리겠다는 협박이 담긴 메시지에 결국 다시 문을 열자 짧은 사이에 집은 완벽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좁은 원룸이 지영의 한숨으로 점철되었다. 엉망이 된 집안 꼴에 이걸 어느 세월에 다 치우고 자야 할지 걱정하며 조심스레 거실로 들어가자 먼저 집에 들어와 있던 수연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지영을 마중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야근했어."
"그놈의 회사는 왜 이렇게 야근을 시킨대.”
"대신 출근이 늦으니까.”
"너 기다리다 깜빡 잠들어버려서 얘네들 미리 달래 놓는다는 것을 깜빡했어. 주방 제외하고는 괜찮으니까 씻고 나와."
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욕실에 있는 물건은 수연의 말대로 잠잠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좀 녹이자 내내 경직되어 있던 몸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식기들을 포함한 집의 물건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약 2주 전 주말이었다. 사건은 언제나 급격하게 하지만 잔잔하게 발발했다. 모처럼의 휴일에 느지막이 일어나 티타임을 즐기는데 난데없이 티스푼에서 엉뚱하게 살기가 느껴졌다. 속히 자리를 피하자 티스푼이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에 그대로 꽂혔다. 티스푼이 꽂혔다는 표현이 제법 웃겼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티스푼이 꽂힌 의자의 쿠션도 장렬히 사망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잠해진 티스푼을 뽑아 싱크대에 넣자 이번에는 냄비 뚜껑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싱크대 아래로 몸을 숙이며 가까스로 피하자, 타깃을 잃은 냄비 뚜껑이 처절하게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을 하는데 이제는 프라이팬부터 책상에 놓아둔 펜, 이미 전사한 의자까지 덜그럭 거리며 시동을 걸기 시작했고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지영은 집 밖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온갖 물건들이 지영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고 집 안이 난장판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녀는 집에서 쫓겨났다. 한가한 휴일의 어느 순간이었다.
잠옷 차림에 갈 곳도 없어 집 앞 카페에 앉아있다가 느지막한 저녁에 돌아간 지영은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과격하게 환영하는 집기들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는 결국 자신의 오랜 친구인 수연에게 SOS를 요청했다. 어렸을 적 신내림을 받고, 현재는 억대 연봉을 받는 유명한 무당인 수연은 그날 새벽 지영의 집에 도착했고 현관에 쭈그려 앉아 오고 가지도 못하는 처량한 집주인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도와주세요….”
“얼씨구.”
“사람이… 아니 집기가 나를 죽이려고 해요.”
“집기가?”
지영의 말이 끝나자, 수연이 거침없는 손길로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산 모양으로 뭉쳐져 집주인을 기다리는 집기들이었다. 그 기괴한 광경에 수연이 황급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대자 목표물을 잃어버린 집기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연은 이러한 기괴한 현상을 보며 단박에 진단했다.
“원혼이네.”
“원혼?”
“너를 노리는 악귀들이 집기에 모조리 붙어버렸어. 이걸 떼어내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겠는데.”
“어떻게 해?”
“장기 출장료. 삼 천만 원.”
“… 악덕 사장.”
그렇게 지영과 수연의 얼렁뚱땅 퇴마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근 이주 간 수연은 주기적으로 지영의 집에 방문해 제령을 했다. 제령을 하면 일시적으로 집기들이 잠잠해졌지만, 이내 효과가 다하면 집기들은 다시 지영을 노려왔다. 결국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채 이 주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고, 지영은 집기에게 살인 협박을 당하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혔지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수연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과거를 회상하다 너무 오래 욕실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씻고 나오자, 수연은 제령을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수연은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갈 거야?”
“가야지. 힘들어서 난 이만 자야겠어. 날이 갈수록 원혼들의 힘이 세져서 제령을 해도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어. 덕분에 퇴근 시간이 덩달아 늦어지고 있으니 추가 요금이 상당히 붙겠는걸?”
“나쁜 년….”
“당분간은 앞에서 말했던 요금대로 처리해 줄게. 친구 잘 둔 거야. 아니었으면 진작 죽어서 땅 속에 묻혀있었을거야.”
“그래 그래. 참으로 고맙다. 빨리 가라.”
친구에게 돈을 청구하며 생색을 내는 수연을 쫓아내자마자, 지영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길고 긴 하루들의 연속이었다. 곧 지영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수연은 지영의 집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내내 원혼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수연을 괴롭혔다.
“아무 잘못도 안 했어."
"근데 왜 죽였어?”
"다 네 탓이야.”
"너만 없었으면…!”
불쌍한 영혼들의 원념이 사무치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에 억울함을 느끼고 세상을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은 충분히 성불할 수 있었음에도 좁은 원룸에 틀어 박히길 자처하며 갈 곳 없이 지영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방대한 영혼이 지영에게 매달리고 매달려 있다가 결국 집기에 자리를 잡았으니, 지영의 집에서 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든 일은 지영이 자처한 몫. 앞으로 원혼들을 달고 살아야 할 지영이 불쌍했지만 수연은 쏠쏠한 벌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다. 다음 날 점심. 지영은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역으로 향했다. 역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쾌청했다. 30분 걸려 도착한 직장은 한낮임에도 번쩍이는 간판을 위시하고 있었다.
‘K I T C H E N’
키친이라는 상호명이 쓰인 가게로 들어가자 네다섯 명 정도가 되는 팀원이 지영을 반겼다.
“스푼. 오늘 의뢰 확인하고 바로 출발 부탁할게.”
“네. 오늘도 파이팅!”
지영이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에 들어가자 서너 가지 정도의 메일이 메일함에 쌓여 있었다. 지영은 그중 가장 최근 온 메일부터 열었다.
[청부살인 KITCHEN] 의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