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안 써진다. 담당자는 늘 도서관에서 작업을 했다. 그는 도서관의 개방감이 좋았다고 했다. 집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천장. 결코 닿을 수 없는 그 공간의 개방감, 그것이 자기를 집중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 직관적인 느낌은 알고 보니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라고 했다. 층고가 높은 곳에서 인지적 활동이 더 잘 된다는 결과를 검증한 연구를 발견했다면서.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집을 나섰다.
걸었다.
플라뇌르? 뭐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뜻이 산책자였던가. 내가 그 단어를 제일 먼저 발견한 곳은 정지돈의 에세이로부터였다. 나는 걸으면서 걷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
핸드폰을 보며 바쁘게 걸음을 움직일 때와는 다른, 동네의 군상이 다가온다. 그 가게는 없어졌고 이 가게는 생기는, 전에 나무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나무들이 심어진,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혹은 통과 의례처럼 지나쳐가는 사람들. 마포구 의류 수거함의 이름 ‘오시네요’를 보고 혼자 쿡쿡거리거나 가게 홍보 문구를 자세히 읽어보는 일.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일 때, 전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보였다.
나는 지금 세상을 살피고 마음을 살피는 중이다. 단순히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고. 한량 놀음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
한참을 걸었다.
마감이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돌아온 집은 바깥세상과 달랐다. 우리 집엔 강이 없었고, 나무도 없었고, 바람도, 사람도 없었는데, 그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는 내가 있었다. 바깥세상과 집의 같은 점이라고 한다면 그뿐이다. 어떤 기억을 가진 내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그 기억을 가진 채로 책상에 앉았다. 솔닛은 같은 책에서, 걸으면서 “무엇을 써야 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깨달았다”라고 했다. 그는, 걸으면서 그 장소를 파악하게 되고 그 장소에 기억과 연상의 씨앗을 심게 된다고 했다. 어라. 그렇다면 나는 바깥세상에 관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 기억과 연상의 씨앗은 그곳에 뿌려졌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써 보내야 할 내용은 ‘내가 생각하는 집’이었는데?
집을 걸어야 하나, 라는 생각을 10초 정도 해보았다. 걸을 만한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 집을 왕복으로 걷는 시간도 그 정도면 충분할 터다. 일단 의자에서 일어나 보았다. 이걸 써서 10만 원이라도 벌어야 방 있는 집에서 살겠지, 그런 생각이 내 다리 근육을 움직인 것 같다.
마감이 한 시간 오십 분쯤 남은 시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