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곧 방. 5평은 그렇다. 침대와 옷과 책상 같은 살림살이의 필수템을 두고 나면 남은 공간이 별로 없다. 그 공간을 비워 두는 것이 공간에 대한 예의겠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 책 모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예의 따위는 사치일 뿐인 것이다. 책장 없이 많은 책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집안 곳곳이 서재가 되는 수밖에 없다. 집은 침실이자 주방인 것으로 모자라, 휴식 공간이자 취미 방이 되어야 하고, 서재의 모습까지 갖춰야 한다.
몇 묶음의 책을 싸 들고 이곳에 이사 온 날, 그는 책장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 책장을 사는 것보다 책장이 들어갈 만한 빈자리를 전부 책으로 채우는 게 현명하리라 판단할 정도로 그는 책을 저장하는 인간이었으므로. 방에 대한 예의도 없이 그리 마음먹었다. 집은 차곡차곡 서재가 되었다. 한편 기묘한 침실이기도 했다.
【책의 이사】
책들이 이사하는 날이다. 장서가의 작은 집에서 이루어지는 책 간의 이사는 분기별로 발생하는 의식적 행위로서, 책들의 위상을 결정 짓는다. 어떤 책은 밀려나고 어떤 책은 우위를 점한다.
샀긴 샀으나 도저히 읽히지 않은 채로 잊힌 책들과 다 읽었지만 별로 소중하지 않은 책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그곳은 신발장. 신발은 자기 공간을 책들에게 내주고도 성내는 법이 없지만, 언제나 확실하게 존재감을 표출한다. 발 냄새와 물체의 냄새 그 어디쯤 있는 신발의 냄새는, 습기 제거제의 냄새와 섞여 책으로 스민다. 가장 가까이에 있다가 가장 멀리 밀려나는 과월호 잡지 무더기를 보며, “미안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너를 전시할 수 있는 공간만 있었다면 전시했을 거야.” 그는 그렇게 읊조리곤 신발장 문을 닫았다. 문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책의 겸업】
책은 홀로 서 있으면 쓰러진다. 북엔드가 고정해주든, 책과 책이 서로를 지탱하든, 다 같이 모여 있어야 본연의 형태를 유지하며 품위 있게 서 있을 수 있다. 책이란 필연적으로 ‘많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물체인 것이다.
책 권수보다 북엔드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장서가는 이 이상의 북엔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잘한 소품이야말로 5평에선 짐에 불과하다. 그는 북엔드 용도로 만들어진 북엔드를 포기하고, 읽히기 위해 만들어진 책을 북엔드로 활용한다. 북엔드가 되려고 가로로 누운 책들은 운명을 직감한다. 한동안은 읽히지 않겠군. 가로로 쌓아 올려진 책들 가운데 하나를 꺼내는 일을 제 주인이 성가셔한다는 걸 알고 있다.
싱크대와 인덕션으로 눈을 돌린 그의 눈이 그릇 꽂이를 향한다. 그릇꽂이는 책상 근처에 놓인다. 책들이 그릇의 자리를 대신한다. 싱크대 속 그릇들 역시 운명을 직감한다. 한동안 싱크대에서 살겠군. 이 집에서 책들의 위상이 자기들보다 크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장서가의 작은 5평에는 완벽한 서재도, 완벽한 침실도 없다. 대신 그곳은 전부 서재이고 침실이다. 오후 다섯 시에는 서재였다가 밤 12시에는 침실이 되는, 또는 새벽 내내 서재였다가 오전이 되어서야 침실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변화무쌍한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그는 책이 있는 곳에서 자고 책이 있는 곳에서 눈을 뜰 뿐이다. 말 그대로 책과 함께 살아가는 집.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 이곳은 5평이라는 수치적 한계와는 무관하게 확장하는 생각을 위한 무한의 공간이다.